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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선임파체질의 동지들은 들어라

1. 체화(간단한? 사담)

일상을 살아내는 일이 추상적 고역들로 얼룩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뭐 지금이라고 다르겠느냐만은). 구체적인 것들과 접속하는 감각이 흐릿해져가며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언어를 찾지 못해 헤매었다. 여러가지 정신적 고초들을 겪으며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가늠할만한 좌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내게 내려진 진단명은 불안장애. 전문가의 병리적 선고가 당시의 상태를 해명시켜 준 것은 아니었다. 환자를 석화시키며 케이스로서만 대하는 그에게 내 안의 내밀한 경험 모두를 공유하진 않았다. 의사들의 환원주의적 세계관에는 질릴대로 질려있었다. 스스로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연출하며 그의 상담을 칭찬했고 그 날을 마지막으로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그 후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다. 낭만적인 자기연민 역시 이제는 희미해졌다. 정상이란 뭐고 비정상이란 무엇인가. 딱히 심각할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나는 존재하고 있다.
무거운 사적 고백만을 위해 적어내려간 글은 아니다. 당시 접했던 한 책의 흥미로운 개념은 나를 사로잡았고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병원을 오가던 나는 담당의와의 면담과 병행하여 ‘로널드 랭’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분열된 자기>(The Divided Self, 1960)의 텍스트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랭이 몸담았던 당대의 정신의학계는 조현병 환자를 전기충격을 통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랭은 이에 맞서 조현병 환자들이 처한 존재론적 위기에 주목했다. 환자들을 경험하는 주체로서 인정하고, 그들이 서술하는 고장난(당시 정신의학계의 표현에 따르면) 체험 세계를 내적 논리가 있는 실존적 표현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랭의 이론은 당시 진행되던 의사와의 면담과 대비되며 내게 큰 인상을 남겼다.(국내에는 왜 이렇게 학제 간을 넘나들며 통합적 이론을 구축한 의사가 없는가? 당장 그들에게 실존주의를 들먹였다가는 케이스가 아닌 진짜 미친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튼 <분열된 자기>에서 내가 몰두한 것은 ‘체화’라는 랭의 개념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자기 과 함께 있거나 몸 안에 밀접하게 묶여 있다고 느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은 자기 몸이 살아 있고 실재하며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한, 자신이 실제로 살아 있고 실체하며 현실적이라고 느낀다. (…)
하지만 꼭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 몸에 합병된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늘 그랬듯이 자신이 몸에서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완전히 육신이 된 적 없다거나 자신이 어느 정도 ‘체화’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 로널드 랭, <분열된 자기>
체화라는 개념은 조현류 스펙트럼의 말로인 정신분열, 즉 몸과 정신의 파국적 분열의 반대편에 위치하며 영육의 이분법이라는 뿌리깊은 구조를 가시화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체화를 바람직하고 건강한 것으로 여긴다. 전혀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정신은 자신의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해방이라는 수사가 너무 거창하다면 적어도 육신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
나는 어떠한가? 나는 태생적으로 체화의 정도가 매우 낮았다. 몸을 원하는대로 다뤄내지 못했다. 어릴 적 체육시간은 지옥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남학우들 모두가 축구를 하러 나가면 나와 비슷한 처지 몇몇과 운동장을 거닐거나 교내 도서관으로 대피하곤 했었다. 현실의 역동성 보다는 관조적 거리감에 더 익숙한 ‘반()신체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육체에 대한 부채감이 나를 짓눌렀고 그 때문인지 나는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내가 체화라는 개념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랭의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내 안에 실재하지만 명확히 포착되지는 않던 균열들이 언어화되며 응집되는 것을 느꼈다.

2. 극점

속칭 ‘아카데믹’한 인간들은 언제나 신체와의 연결 문제에 직면해왔다.(물론 예외란 있고 말고요) ‘미시마 유키오’의 우스꽝스러운 결말은 체화의 결핍이라는 문제와 선명히 교차된다. 미시마는 정신의 과잉을 육체의 극단으로 상쇄시키려 했다. 그가 택한 체화의 방식(그가 주창한 육체미 운동과 심취해있던 바디빌딩이 그 편린이다)은 극에 달했고, 스스로를 육화시켜 파열해버렸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왜소한 체격과 심약한 성미에 열등감을 품었던 미시마는 보디빌딩을 접한 후 돌연 다른 사람이 되어 반동적 남성성에 집착하게 된다. 그의 과격한 후기 사상과 행보는 미진했던 육체에 대한 집착 없이는 설명되기 어렵다. 육체와 감각에 천착했던 그가 도달한 결말은 과잉된 체화를 통해 정신을 증명하려는 시도, 자기미화된 육체라는 자가상의 파탄이었다. 단련된 근육질 몸을 과시하며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는 그의 화보와 마주할 때면, 나는 거울을 볼 때처럼 시선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극단적인 육체로의 욕망이 어떠한 결핍의 반동일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몸을 향한 집착이 몸을 회피하던 나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시마의 할복은 정신분열이라는 극단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다.
미시마는 육체를 향한 과잉투사 끝에 자기해체라는 극점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정신분열로 환유되는 정신으로의 편향이란 어떠한 모습인가. 기울어진 정신의 종착지 역시 모종의 파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자기파멸의 표상일 뿐이다. ‘구보 박태원’은 소설이라는 매개를 통해 과도한 정신이 촉발하는 내파의 비극을 그려낸다. 그는 단편 <적멸>(1934)에서 ‘흉선임파체질’이라는 당대의 의학용어를 통해 자살자들의 기질에 관해 논한다.
나는 때때로 이러한 것을 생각합니다. 즉 자살을 한다는 것은 혹은 숙명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요. 법의학은 우리에게 ‘자살자에게서 거의 일정한 공통적 체질을 인정할 수 있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즉 흉선임파체질이라고 하는 것 말씀입니다. 까닭에 혹은 나의 체질도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입니다. - 박태원, <적멸>
<적멸>은 소설가인 화자가 우연히 만나게 된 정신이상자와 친우가 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다룬 짧은 소설이다. 정신이상자가 내뱉는 독백과도 같은 내밀한 고백들은 박태원 자신 내면 속 심연에 대한 고백과 다름없다. 높은 수준의 지성을 지녔지만 미치광이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매장 당한 한 광인의 고백은 광기와 정상 사이의 경계에서 진동하며 당대 지식인들의 어두운 면을 투영해낸다. 그가 비통한 소속감을 느끼며 칭한 ‘흉선임파체질’이라는 구시대의 병리학 용어는 자기파멸로 이르게 하는 정신의 독주를 비틀어 은유해낸다. 반신체적 인간인 나는 그들에게서 동류로서의 감각을 느낀다.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던 그들의 서사는 불현듯 내 것일 수도 있었던 가능성으로 밀려 들어온다.
정신분열 혹은 완전한 육화, 이 이항적 파국은 도식화된 극단적 예시이다. 그것은 균형을 상실한 채 한 쪽으로 기울어진 삶의 폐해를 드러낸다. 몸과 정신, 이 오래된 이분법에서 우리는 왜 자유로울 수 없을까? 나는 미시마처럼 몸을 통해 정신을 상쇄시키는 길을 택했다. 정신으로 편향된 삶은 스스로를 해하는 독이 되었다. 정신적 인간이 중도로 나아가는 길은 육체로의 반동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면에서 미시마의 선례는 육체로의 맹목적 귀환이 어떠한 파멸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남는다.
문제는 수많은 정신적 인간들이 육체에 대한 부채감을 떠안은 채 이를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상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몸이 곧 자기라는 관념이 희박했다. 랭의 말마따나 체화되지 못한 것이다. 몸과의 불화가 곧바로 정신분열(실제 병리라기 보다는 극단의 기호로서)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당사자의 세계 속 무수한 균열을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몸은 우리를 둘러싼 실제 세계, 살아있는 경험에 뿌리를 둔다. 몸은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 숨쉬며 서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몸을 통해 정신의 외연은 조절되고 지성의 무분별한 확장은 억제된다.
반면 정신으로의 과도한 편중은 몸을 의식의 부속물로 전락시켜 침묵하게 만든다. 이러한 불건전한 위계는 추상적 구조에 그치지 않는다. 당사자의 존재방식을 결정짓는 실질적 양식으로 작동해 나아가는 것이다. 정신은 왜 몸보다 우월해야 했는가? 육체로의 전향을 꿈꾼 나에게 이 문제는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숙제로 다가왔다.

3. 접지

몸은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오래된 미신은 몸과 감각을 천대하는 기독교식 금욕주의로부터 관념화되어 오늘날에까지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몸에 대한 금욕적 태도는 공간감각(시각)을 몸 감각(촉각, 미각, 후각, 청각)보다 우월한 것으로 바라보는 서양철학의 오래된 전통과 공모되어 왔다. 이러한 위계의 전통은 여러 시대의 반박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인식과 무의식 속 깊숙이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시각만이 인간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떨어트려 객관적 인식을 생산해낼 수 있다 여겨졌다. 몸의 다른 감각들로부터 유리되어 특권을 부여받은 시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곧 정신의 체현으로 여겨졌다. 육체의 감각은 동물의 감각으로 전락했고 그러한 감각에 기대는 행위는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세계는 시각적 감각질서 속에서 재편된다. ‘본다‘ 라는 감각은 절대적이다. 모든 것은 포착당해 붙들려 매여진다. 이미지화되고, 개념화되고, 양화되며, 측정된다. 몸이 내포하는 질적 차이들에 대한 감각과 언어 이전의 정동들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소외된다. 몸과 유리된 개념과 문자들이 공간감각 속을 부유하며 증식한다. 윤색된 어휘와 수사, 전문적인 인용들이 끊임없이 생산되지만 그러한 ‘정신’ 앞에서 나는 거울을 볼 때처럼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러한 곳엔 몸이 없다. 삶과의 밀착이 없고 몸이 세계와 조응하려 할 때의 겸손함 같은 것도 없다. ‘흉선임파체질’이라는 은유가 지시하던 정신의 탁류는 아직도 동시대 사유의 기저에서 그 가능성을 내포한 채 흐르고 있다. 우리는 몸을 다루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오래전 나는 내 인생을 관통할 몸과 정신의 문제를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몸에 대한 기나긴 희구가 시작되었다. 나는 오랜 기간을 달려왔고 구력도 꽤 쌓았다.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일상을 영위하며 만나는 러너들과는 정보를 주고 받으며 달리기의 즐거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건강한 혈색의 다부진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진심으로 즐겁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라는 행위에 접근하는 나와 그들간의 근본적 차이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낸다. 세련되게 체화를 유지해내는 그들과 ‘흉선임파체질적’인 나는 출발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성취감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실존의 문제, 즉 생존의 문제였다. 정신분열적 결말에 대한 암시들이 내 안에 산재해 있었고 나는 이에 저항하기 위해 몸을 비틀어 짜내갔다.
정신에 집중할 때면 몸과의 연결고리는 희미해졌다. 나는 그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했다. 분열지향에 대한 필사적 봉합.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몸을 쓰는 일을 찾아 떠돌았고 삶과의 밀착을 갈구해왔다. 나는 목공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할 수 없어 난감해하곤 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깨달은 것은 목공이란 이러한 갈망 그 자체였단 것이다. 도구와 몸을 통해 감각이 정신을 앞지르는 과정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의 몸과 삶에 접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몸과 정신의 통합적 순간들을 간간히 성취해내며 분열적 삶의 실마리를 조금씩 더듬어갈 수 있었다.

4. 수행

톱질은 그에 관한 가장 명료한 실천이었다. 톱질을 할 때 나는 사물이 된다. 톱질의 순간, 몸은 자신과 접속한 톱이라는 행위자의 연장이 된다. 머리와 땅에 디딘 무릎, 톱을 든 손은 같은 선상으로 정렬되며 팔꿈치를 제외한 모든 관절이 잠긴다. 몸은 하나의 축이 되어 팔꿈치만이 상하 왕복운동을 수행한다. 그렇게 힘을 뺀 채 운동을 반복하면 나머지는 톱의 몫이다. 제 알아서 나무를 켜나가며 전진한다. 톱은 알맞게 쓰인다면 스스로 행위하며 스스로의 존재목적을 수행한다. 협력의 순간, 몸이 곧 톱이고 톱이 곧 나다. 톱과 조응한 손 끝으로부터 나무조직을 분리해나가는 감각이 생생히 전해진다. 경쾌한 톱소리와 함께 단단한 나무가 썰려나간다. 여기에 시각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썰려나가는 나무 위로 배출된 톱밥이 쌓이며 톱의 진로를 가린다. 적당히 쌓일 때마다 입으로 불어 날릴 수 있겠지만 흩날리는 톱밥을 흡입하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시각을 배제했다. 톱밥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손끝 감각과 그와 제치인 소리에 집중한다. 감각이 무뎌지거나 소리가 둔탁해지면 톱질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신호다. 익숙해지면 눈을 감고도 바르게 톱질할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손끝 감각은 작업자 내부에서 수행의 기준이 된다. 반대로 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언어다. 그것은 내적인 치밀함을 외부로 흘려보내는 하나의 신호가 되어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간다. 목공 숙련자들은 예로부터 소리만 듣고도 작업자의 수행능력을 평가할 수 있었다. 톱질 소리, 대패질 소리, 망치질 소리, 숫돌에 날을 가는 소리, 모든 행위에서 소리란 객관적이고 강력한 지표다. 소리는 작업자의 내적 상태와 기술의 정확도를 반영하는 외재적 근거가 된다. 손끝 감각이 당사자의 영역에서 절대성을 발휘한다면, 소리는 그 특성처럼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가며 다른 의미로의 ‘공간감각적’ 네트워크를 발생시킨다. 톱질 소리가 공간을 메울 때, 몸의 기술과 그 안에 접혀 있던 시간의 밀도가 소리라는 매개를 통해 모두에게로 확산된다. 숙련된 작업자들은 청각으로서 소통하며 서로를 인정한다. 이러한 정동적 네트워크 안에서 위계화된 감각질서는 전복된다.
작업자는 몸과 재료를 세심히 살피며 작업을 수행한다. 그러나 균형은 돌연듯 어긋난다. 나뭇결은 뒤바끼며 터져나가고 조정이 틀어진 공구는 제 기능을 잃는다. 재료와 도구는 스스로의 활력을 발휘하며 사태는 재정렬된다. 작업자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겸손해진다. 환경 속 사물들은 활력을 가지며 행위한다. 조율과 타협, 때때로 굴복할 때 수행은 이루어진다. 행위자들은 수행자를 가르치며 작업장에 들어선 작자의 오만을 보란듯이 깨부순다. 다룬다는 것 아닌, 다뤄진다는 느낌. 이러한 힘의 재분배 속에서 정신과 몸이 뒤섞인다. 정신을 담지해낸 몸은 세계 속으로 확장되며 나아간다. 몸은 비인간 차원을 새로이 감각해내는 통로가 된다. 톱끝을 따라 이어지는 촉각의 파장 속에서 나무와 도구와 인간이 뒤섞인다.

5. 청취

체화란 정련된 이론적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몸을 통해 길어낸 일상적 실천이다. 지적 인간을 지탱하는 근간은 자신이 성별(聖別)되었다는 자의식이다. 그러한 의식이 비루한 현실이 유발하는 오염으로부터 정신을 보호한다. 정신과 사유는 그러한 현실을 ‘딛고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유란 세계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힘을 제공한다. 정신적 인간은 언어와 개념을 통해 세계를 탐구하며 질서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속 방식은 세계와의 직면이 만들어내는 마찰열을 희석시켜버린다. 현실의 생생한 감각과 관계로부터 서서히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지적으로 유능한 이조차 스노비즘의 전형으로 퇴색해버린다. 쓰기도, 읽기도 고역인, 씁쓸한 유머같은 텍스트들은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역설은 몸을 잃은 사유가 낳은 불가피한 부산물처럼 보여진다.
접지 불가 상태의 사유라는 한계는 단순한 아이러니에 그치지 않는다. 편향된 정신은 스스로의 균형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일원론적 통합이라는 실천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 부름에 대한 외면은 지적 인간에게 내재한 오랜 부채감의 근원이자 균열과 결핍이라는 이름의 수치다.
그러나 사상적 감응과 행위적 실천이란 여전히 별개의 문제다. 고루한 이분법에 환멸을 느낄지라도 정신과 몸의 통합적 삶을 실제로 살아내기란 쉽지 않다. 세련된 체화자들 앞에서 내가 겪었던 당혹감과 열패감은, 나라는 개인의 양식을 넘어선 보다 근원적 차원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점철된 삶의 조각들 속에서 얻어낸 하나의 확신은 몸과 정신의 합일 속에서만 새로운 공존의 가능성이 모색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내적 통합의 선행만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공존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위대한 사유는 심장에서 나온다’. 파스칼의 <팡세>에서는 이러한 문구가 나온다. 여러 문맥을 담지한 이 문장은 지금 이 순간 그 위상을 정렬해낸다. 선명히 드러난 그 경로를 우리는 각자 받아 안을 수 있다. 그 길은 유려하거나 우아한 방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랫동안 밀쳐내며 지나쳐온 어떠한 층위를, 노획하듯 되찾으려는 처절한 시도에 가깝다. 우리는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을 다시 규정하게 된다. 체화는 조용한 진동으로, 혹은 예기치 못한 파열로 이어지겠지만 그 모든 형태의 수행은 각자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몫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명에 비껴가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오래 전 잃어버린 감각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할 것은 들이차오르는 감각의 탁류다.
그러니 흉선임파체질의 동지들은 들어라.
머리가 아닌 심장을 쥐어짜십시오.
움직이십시오.
느끼십시오.
그리고 멈추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