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밤입니다. 형장
이 밤, 형장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불야성의 한복판 인파의 노도 속에? 정치한 자신의 다락방 안에? 아니면 그 사이의 어디쯤에 계십니까. 형장을 뵌 지 너무나 오래 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희는 일면식조차 없는 사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춤추는 서울,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제 조그만 다락방 안에서 이 글을 적습니다.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룻밤의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참히 피어났다가 무참히 스러지는 그런 모든 이야기들.
형장,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인생(人生)을 말하지만 결국엔 제각각의 경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할 수 있는 것, 저란 인간의 생(生)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저는 지금 세상에 대한 회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그것을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 인생의 오랜 벗인 형장을 호명한 것입니다(···)
미망 뿐인 삶을 살아 왔습니다. 저잣거리의 증기로부터 도피하여 들녘의 그늘만을 좇는 삶. 생의 현장 속을 비집고 들어가 한 자리 차지해낼 투지도 없으면서, 그들을 지독히도 경멸하고, 그 경멸의 대상들에게 모멸 받는 비참한 나의 전생(全生).
형장! 단 한 번도 '보편성’이라는 것을 손에 쥐어 본 적 없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 지난한 시간들을 온몸으로 새겨가며 풍화된 생이란 과연 어떤 빛깔을 띄는 것입니까? 어떤 형태, 어떤 가치,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독야(獨夜) 속을 헤매이는 어리석은 가장인형(假裝人形), 그것이 바로 저였던 것입니다. 지독한 관념에 붙들린 채, 반쪽 뿐인 인간성을 꽉 움켜쥐고서(···)
저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까? 저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까? 어리석은 자들과 어리석은 나. 호혜의 수라도, 그것이 세계란 것입니까 형장?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가 아닙니다. 세상 또한 아닙니다. 형장! 주위를 둘러 봐 보십시오! 우리 인간의 생(生)이란, 각자의 경험들이란, 그 모든 일상들이란, 결국 음식남녀(飮食男女)에 불과한 것입니까?
고원의 풍경은 어떠합니까? 이리 내려 오십시오 형장. 내려와 성난 탁류의 세례를 그 몸으로 받아내십시오. 찬란히 빛나는, 간과했던 억경의 경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장. 저는 화생삼매(火生三昧)의 불타처럼 무소의 뿔이 되겠습니다. 유약한 냉소의 껍질은 깨버리고, 불퇴의 첨단에 서서, 생활과 관조의 피안에 서서, 끊기지 않는 뱀의 경을 외워나가겠습니다.
파계의 심포니
무한출혈의 육박성
신경줄을 타고 흐르는 동물정기
춤추며 깨부숴나가는 위의계율
느껴지십니까 형장? 이것이 비루한 저의 진심입니다. 누군가 캐물어와도 한사코 숨겨야만 했던, 제가 가진 전부인 초라한 신력(信力)의 편린. 모든 것이 피어나고 스러지길 반복하는 이 세계. 그곳에 속한 저에게 허락된 실재란 곧 무용한 나란 인간의 신념뿐. 그것이 결국 정신의 착란에 불과하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생도(生道)를 즈려밟아 나아가겠습니다. 아! 나의 ‘착란’, 저는 이 실용적이지 못한 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만 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형장. 오늘의 혈기를, 눈물을(···)
형장! 삼세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외로이 떨고 있을 나의 형장! 문자반야(文字般若) 혹한의 끝에서, 명랑의 냉풍이 벼려낸 정신의 칼날을 품고, 피와 살이 뿜어내는 억만고열의 증기 속에서 춤추며 불타오르십시오. 모두 다 태우고 태운 후 다시 또 불태워 한 줌의 재가 되십시오. 재가 되어 오탁의 사바, 이곳 저곳을 情과 함께 가련히도 흩날리십시오. 그렇게 흩날리며 극락정토 모두 다 모두 다 베어내버리십시오.
형장! 나의 벗, 그대는 분신법멸(焚身法滅)의 살아있는 불꽃이 되십시오. 그것이 바로 형장이나 나같은 족속들이 살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옴 도비가야 도비바라 바리니 사바하
옴 도비가야 도비바라 바리니 사바하
옴 도비가야 도비바라 바리니 사바하
눈 먼 자에게 광명을
방황하는 자에게 안식을
1991年 11月 2日
시간은 흐릅니다 형장. 선상이 아닌 진동으로, 파동으로.
오늘! 다시 한 번 찾아온 세계최후의 날.
모든 미망과 회한은 여기에 두고
삼천세계(三千世界)
생성불식(生成不息)
실재토파(實在吐破)
고난돌기(苦難突起)
파계무참(破戒無慙)
생활무한(生活無限)
애정지둔(愛情至鈍)
달려나가십시오 형장, 망설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