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빌딩을 시작한 후 미시마의 내적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가벼운 글. 취사선택적으로 읽어본다면 꽤나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다.
보디빌딩을 시작한지도 오는 9월이면 1년이 된다. 감기에 걸려 3주 정도 한 번 쉰 것 외에는, 꽤나 정진해 왔다. 애초에 육체적 열등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지만, 얇은 종이를 벗겨내듯 이 열등감은 나아져, 이제는 완치에 가깝다.
사람들이 보기엔, 아직 대단한 몸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주관적으로 좋은 체격이라면 그걸로도 괜찮다. 이런 열등감을 30년씩이나 짊어져서 무슨 이익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았다. 30년의 열등감이 1년으로 낫는 것이니, 내가 맹신자가 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번 여름에도, 해변에서 마른 몸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절대로 옷을 벗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보디빌딩을 하지 않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다니는 지유가오카의 체육관에도, 42살에 위궤양 수술을 받고나서 크게 마음을 먹고, 지금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올 여름 처음으로 부끄럽지 않게 반팔을 입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보디빌딩을 바보 취급하며 자신의 왜소함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자, 본심을 꺼낸 김에 보디빌딩 철학을 개진해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지성에는, 아무래도, 그것과 균형을 맞출 만큼의 육(肉)이 필요한 것 같다. 지성을 정신으로 바꾸어도 좋다. 지성과 육체는 남자와 여자처럼, 조화롭게 화합해야 하는 것인 듯하다. 그리스도상이 저렇게나 갈비뼈를 드러낸 앙상한 모습인 것은, 인간이 정신을 시각화할 때 가급적 육체적 요소를 불식시킨 육체를 상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바쿠스상은 반드시 살이 쪄 있다. 그것은 쾌락과 육체와 충동의 상징이기 떄문이다. 이러한 상징은 세간의 상식에 깊게 자리잡고 있다.
육체적인 왕성함과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신념은 널리 유포되고 있다. 인도의 고행자와 같은 뼈투성이의 몸을, 일본인은 일종의 아시아적 감수성으로부터,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상징이나, 세간의 통념은 그래도 괜찮다. 다만 당사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상징처럼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생생히 유전되고 있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지면, 균형에서 승리한 쪽이 진 쪽을 갉아먹어가는 것이다. 마른 인간은 지나치게 지적이게 되고, 뚱뚱한 인간은 지나치게 충동적이 된다. 현대 문명의 불행은 모조리 이 균형에서 비롯된다.
문학가의 예를 들면, 재미있게도, 전후의 파멸형 소설가, 사카구치 안고와 다나카 히데미츠의 남다른 거구는 물론이고, 다자이 오사무도 꽤나 튼실한 장신이었다. 세 사람 다 몸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육체 멸시의 사상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육체에 적의를 품고, 이 육체를 갉아먹기 위한 사상을 발명하기 위해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일부러, 무리하게 불균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기야 이 세 사람이 아주 건장한 몸을 가지기는 했지만, 뇌가 빈 작가들에 비해 얼마나 문학가다운지는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지적이고, 혹은 지나치게 감각적인 작가들이 있다. 문학작품을 통한 감각이라는 것은, 원래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적인 작가는 이 두 가지가 다 해당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확실하게 육체의 인상이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 육의 광채, 진정한 관능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 이것은 전술한 예시와는 정반대의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 쪽이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드의 말처럼 “관능성이야말로 예술가의 최대 미덕”이기 때문이다(덧붙여 말하면, 지드 그 자에게도 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 작가들은 비록 세밀한 성적 감각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육체의 힘과 형태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근대 예술의 단점은, 바로 그 점에 있다. 지성만이 이상발달을 하고, 육이 그에 따르지 않는 것이다. 육이라는 것은, 내게는 지성의 부끄러움 또는 겸양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예리한 지성을, 날카로울수록 육체로 감싸야 하는 것이다. 괴테의 예술은 그 모범이다. 정신의 수치심이 육을 몸에 걸치고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아름다운 예술의 정의이다. 수치심 없는 지능은 수치심 없는 육체보다 한층 더 추악하다.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에선, 육체와 힘과, 정신의 겸양이 훌륭하게 일치하고 있다.
속았다고 생각하고 보디빌딩을 해 보아라. 하기야 내가 추천하는 것은 인텔리 제군들을 위한 것이고, 뇌가 빈 남자들이 보디빌딩을 하여, 불균형을 강화하는 것은, 참으로 헛된 짓이다.
<만화 요미우리> 1965년 9월 20일